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 (문단 편집) == 옴진리교와 사카모토 == 1987년 창설된 옴진리교에 빠진 사람들이 소재는커녕 생사도 알 수 없게 되자 가족들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여성 저널리스트 에가와 쇼코(江川昭子)는 '딸이 옴진리교에 빠져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화를 받고 이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을 주변 인물 중에서 찾았는데, 이때 나타난 사람이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사카모토 츠츠미(坂本堤)였다. 사카모토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문선명]]이 교주로 있는 그 통일교가 맞다.] 관련 사건을 맡은 경험이 있는 변호사였다. 옴진리교 신자의 친지들로부터 의뢰를 접수한 사카모토는 옴진리교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옴진리교는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는 옴진리교 피해자 모임을 세우고 각종 [[인터뷰]]에 출연하며 옴진리교를 공격했다. 옴진리교는 대응책이랍시고 사카모토가 소속된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横浜法律事務所)'에 항의 전화와 항의문을 보내자는 운동을 하고 삐라를 뿌렸지만 당연히 사카모토 변호사의 평판만 더 높여 줄 뿐이었다. 옴진리교는 사카모토를 견제하려 했지만 역으로 사카모토 변호사의 평판만 더 높여 주기만 하였으니 옴진리교의 처세술이 상당히 어리석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TBS 테레비]]는 1989년 10월 27일에 방영할 옴진리교 특집 방송을 위해 특집 방송 취재반(사회정보국, 이하 취재반)은 26일 아침에 옴진리교를 열심히 공격하는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를 인터뷰했다. 같은 날 낮에 취재반은 다시 '보도국 사회부' 기자들과 함께 [[후지산]]의 옴진리교 도장을 방문해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초능력]](?) 시연을 취재하였다. 보도국의 인터뷰를 마치고 취재반에서도 인터뷰를 하려고 했지만 옴진리교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취재반은 묻지도 않았는데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를 교주의 초능력 시연 장면과 함께 방영한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 촬영한 영상을 방영 전 옴진리교 측에 우선 보여주겠다고 제안하며 인터뷰를 따내고자 회유를 시도했다. 당일 밤 늦은 시각에 옴진리교 간부 3명이 TBS로 찾아와 방영 전에 변호사의 인터뷰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방송을 불허하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결국 TBS측은 옴진리교에 인터뷰 내용을 보여주었다. 이때 방문자들 중 하야카와 키요히데(早川紀代秀)는 비디오에 있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적 정보를 상세히 메모하였다. 방송국이 인터뷰를 보여준 뒤에도 교단이 강하게 항의한 탓에 결국 옴진리교 특집 방송은 결방됐다. 동시 방영하고자 했으므로 당연히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도 묻히고 말았다. 1989년 10월 31일, 옴진리교의 간부 하야카와 키요히데와 고문변호사 아오야마 요시노부(青山吉伸)는 사카모토의 법률 사무소를 방문해 소송을 회피할 목적으로 사카모토와 교섭하려 했다. 하지만 옴진리교 때문에 평판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사카모토 변호사는 옴진리교 측의 논리적 허점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옴진리교 교단 전체에 고소크리를 먹이겠다고 본격적으로 총칼을 빼들었다. 교단 간부들은 아사하라에게 "교섭할 여지조차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부정적인 의견을 보고했다. 말 그대로 [[관광]]당해 [[자승자박]]을 자초한 꼴이 된 옴진리교는 어쩔 줄을 몰랐고,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사카모토를 어떻게 해칠지 고심했다. 논의 끝에 결국 사카모토를 살해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옴진리교 신자인 한 변호사를 통해 사카모토의 주소도 손에 넣었다.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가족 참살 사건은 이렇게 해서 터진 것이다. 이때 사카모토와 그의 가족, 주위의 변호사들, 옴진리교 피해 대책 관계자들, 시민들이 [[TBS 비디오 문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적어도 TBS가 이 짓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가 옴진리교를 비판하고 적대하며 신자들을 탈퇴시켜 데리고 나오기까지 한 것도 옴진리교와 정면 충돌하는 사유가 되진 않았다. 그런데 TBS가 일본 방송 언론계 역사상 최악의 참사를 저지르는 바람에 비틀어지면서 이 사건이 터진 것이다.]를 빨리 파악했더라면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가 잔인하게 참살당하는 범죄는 일어나지 못했을 테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사카모토 이후 옴진리교 피해자 대책 변호인단의 중심 인물로서 활약한 타키모토 타로(滝本太郎) 변호사도 사카모토처럼 독극물 테러를 당했다. 하지만 그가 공격을 당했을 때에는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그와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들이 경찰 등 사법기관과 중앙정부, 지방정부 전체에게 도움받아 일본 전국 각지로 분산 대피해서 사카모토 변호사 때처럼 일가가 참살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https://ja.wikipedia.org/wiki/滝本太郎弁護士サリン襲撃事件|일본어 위키백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